home keyboard_arrow_right 공모전 keyboard_arrow_right 사업소개

description 사업소개

layers궁능활용사업 소개

  • 조선의 궁궐과 왕릉은 조선(1392~1897)과 대한제국(1897~1910)의 역사와 전통이 담겨있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자연적, 건축적, 예술적 가치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특히 종묘, 창덕궁, 조선왕릉은 인류가 함께 보존하고 향유해야 할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유산이기도 합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와 한국문화재재단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궁능문화유산의 고품격 가치 창출’이라는 비전에 따라 궁궐과 왕릉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품격있는 문화유산 가치 실현에 힘쓰고, 원형을 복원하고 보존하여 후세에 온전히 물려줄 수 있도록 노력하여 국민과 함께 누리는 공간으로 만들어 나아가겠습니다.

layers5대궁 소개

label경복궁

경복궁
  • 경복궁은 1392년 조선이 건국한 후 1395년(태조 4)에 창건한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백악산을 주산으로 넓은 지형에 건물을 배치하였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가 펼쳐진 한양의 중심이었다. ‘경복’의 이름은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으며, 이곳에서 세종대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반포되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는데 그 후 복구되지 못하였다가 270여년이 지난 1867년(고종 4) 중건되었다. 고종대에 들어 건청궁과 태원전, 집옥재 등이 조성되었으며, 특히 건청궁 옥호루는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경술국치 후 경복궁은 계획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하여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분으로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되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경복궁의 경관을 훼손하였다. 이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경복궁 복원공사가 진행되었고 199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였으며 건청궁과 광화문, 흥복전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경복궁 누리집 바로가기/ http://www.royalpalace.go.kr

label창덕궁

창덕궁
  • 창덕궁은 1405년(태종 5)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창건하였다. 이후 1406년(태종 6) 창덕궁 북쪽에 후원을 조성하였고 1463년(세조 9) 후원을 확대 조성하여 정치의 공간과 생활의 공간이 조화를 이루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 2) 궁궐 중 처음으로 중건되었으며, 이후 역대 왕들이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약 270여년 동안 창덕궁을 더 많이 사용하여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인조대부터 순조대까지 옥류천, 규장각, 주합루, 애련지, 의두합, 연경당 등을 조성하였고, 1847년(헌종 13)에는 낙선재 권역이 조성되어 창덕궁의 영역은 점차 넓어지게 되었다. 특히 대한제국 2대 순종은 황위에 오른 후 창덕궁을 사용하여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대조전 흥복헌은 1910년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광복 이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가족(순종의 두 번째 황후 순정황후,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이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 /창덕궁 누리집 바로가기/ http://www.cdg.go.kr

label덕수궁

덕수궁
  • 덕수궁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들이 모두 소실되자 1593년(선조 26)부터 임시 궁궐로 사용하여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으로 불렸다. 이후 1611년(광해 3)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정해지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다가,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황궁에 맞게 규모를 확장하고 격식을 높였으며, 궁궐 내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전통건축물과 서양식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고, 1907년 일본에 의해 고종이 황위에서 물러나자 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게 되었다. 덕수궁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어 1930년대 들어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동시에 공원화가 진행되어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게 되었다. 1946~47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후 덕수궁의 복원이 꾸준히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이 되었으며, 복원 및 정비 사업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 /덕수궁 누리집 바로가기/ http://www.deoksugung.go.kr

label창경궁

창경궁
  • 창경궁은 원래 1418년(세종 즉위)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창건한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자리였다. 이후 1483년(성종 14) 성종이 세 명의 대비(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를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궁의 이름을 창경궁이라 하였다. 창덕궁과 경계 없이 동궐(東闕)이라는 하나의 궁궐 영역이었으며 주로 왕실 가족들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창경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 8)에 중건하였으며, 1830년(순조 30) 대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4년 뒤에 중건하였다. 그러나 1907년 순종이 황위에 오르자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로서의 모습을 잃기 시작하였다. 1911년에는 일본에 의해 궁의 이름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어 궁궐이 아닌 공원화가 되어 훼손이 심하였다. 광복 후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의 모습으로 복원공사가 진행되었으며 다시 창경궁으로 명칭을 회복하였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은 궁궐 중 유일하게 동향(東向)으로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 /창경궁 누리집 바로가기/ http://cgg.cha.go.kr

label경희궁

경희궁
  • 사적 271호로 지정된 경희궁은 조선후기의 이궁이었다.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었다.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이곳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으며, 특히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본격적인 수난을 맞이하였다. 1910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로 인하여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서울시에서는 1987년부터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을 거쳐 숭정전 등 정전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하였다.